아침의 빛은 언제나 공평하게 찾아온다. 세상의 종말을 막는 S급 센티넬의 침실이라고 해서 예외는 아니었다. 암막 커튼의 미세한 틈을 비집고 들어온 5월의 햇살이 방 안의 먼지를 금가루처럼 반짝이게 했다. 리암은 아엘보다 먼저 눈을 떴다. 그것은 이제 고양이의 생체 시계처럼 그의 몸에 각인된 습관이었다. 자신의 옆에서 새근새근 잠든, 세상의 전부이자 유일한 온기인 존재의 얼굴을 가장 먼저 눈에 담는 것. 그것은 그에게 하루를 시작하는 성스러운 의식과도 같았다. 그는 움직이지 않고, 그저 아엘의 고른 숨소리에 자신의 심장 박동을 맞췄다. 그녀의 흑단 같은 머리카락이 하얀 베개 위로 흩어져 있는 모습은, 마치 눈 덮인 설원에 피어난 단 한 송이의 겨울 동백 같았다. 리암은 저 머리카락을 쓸어 넘기고 싶은 충동을 간신히 억눌렀다. 그의 차가운 손가락이 닿으면, 이 평화로운 잠을 깨울지도 모르니까. 그는 조심스럽게 몸을 일으켜 침대에서 빠져나왔다. 발소리를 죽이고 거실로 나온 그는, 습관처럼 벽에 부착된 단말기를 켰다.
단말기의 화면이 켜지자마자, 아크 내부 게시판의 팝업 하나가 요란하게 떠올랐다. [EVENT] 5월 14일, 사랑을 전하세요! 로즈데이 기념 구내매점 장미꽃 & 초콜릿 할인! 붉은색 하트 아이콘과 장미 이미지로 도배된 팝업창을 보며 리암의 미간이 미세하게 좁아졌다. 로즈... 데이? 장미의, 날? 그게 뭐지. 러시아에는 없는 날이었다. 시베리아의 동토에서는 장미는커녕 이끼를 보는 것도 힘든 일이었으니 당연했다. 리암의 머릿속에서 혼란스러운 사고 회로가 돌아가기 시작했다. 사랑을, 전하라고? 장미로? 왜? 그의 사고는 늘 이런 식이었다. A는 B다, 라는 명제를 받아들이기 전에, 왜 A가 B여야만 하는지에 대한 근원적인 질문에 부딪히고 만다. 그는 손가락으로 화면을 쓸어 내려 다른 게시글들을 확인했다. 온통 장미 이야기뿐이었다. [후기] 어제 미리 사둔 장미꽃으로 여친한테 점수 땄습니다 ㅋㅋ, [질문] 가이드한테는 흰 장미 주는 거 맞죠? 등등. 리암의 순백의 눈동자가 차갑게 빛났다. 이건, 그가 모르는 '규칙'이었다. 아엘도 알고 있을까. 만약 알고 있는데, 내가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면. 그녀는, 서운해할까? 그 생각에 이르자 심장이 쿵, 하고 내려앉는 기분이었다. '서운하게 하지 않기'. 그것은 그와 그녀의 약속이었다. 서툰 언어 때문에, 제멋대로인 성격 때문에 이미 여러 번 그녀를 서운하게 만들었던 기억이 떠올라 목덜미가 서늘해졌다. 안된다. 그것만은, 절대 안 된다. 리암은 팝업창의 '구내매점'이라는 단어를 뚫어지라 쳐다봤다. 이것은 임무였다. 코드네임 '리암', S급 센티넬로서 반드시 완수해야 할,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임무.
…розы(장미)…
그의 입에서 낮은 러시아어가 흘러나왔다. 그는 뒤를 돌아 침실 문을 쳐다보았다. 아직 아엘은 자고 있다. 지금이 기회였다. 그는 고양이처럼 소리 없이 움직였다. 옷장으로 다가가 평소 입는 두꺼운 제복 대신, 얇은 검은색 터틀넥과 바지를 꺼내 입었다. 장교 모자는 쓰지 않았다. 지금은 위압감을 과시할 때가 아니라, 최대한 눈에 띄지 않고 '장미'라는 목표물을 확보해야 할 때였으니까. 그는 지갑과 단말기만 챙겨 현관으로 향했다. 문을 열기 직전, 그는 다시 한번 침실을 돌아보았다. 고요했다. 그는 아주 조심스럽게, 소리가 나지 않도록 디지털 도어락을 해제하고 복도로 나섰다. 문이 닫히는 순간까지, 그는 문틈으로 침실 쪽을 바라보았다. 마치 잠든 주인을 두고 몰래 외출하는 고양이처럼, 그의 마음 한구석에는 미미한 불안감과 함께 기묘한 설렘이 피어오르고 있었다. ‘Блядь(씨발), 들키면 끝이다.’ 속으로 욕설을 중얼거리며, 그는 빠른 걸음으로 엘리베이터를 향해 걸었다. S급 센티넬의 숙소가 있는 최상층의 복도는 언제나처럼 고요했고, 그의 발소리만이 차가운 대리석 바닥에 낮게 울렸다. 그의 머릿속은 오직 하나의 생각으로 가득 차 있었다. '가장, 좋은 장미. 아엘을 위한, 최고의 장미를 손에 넣는다.'
아크 본부 지하에 위치한 구내매점은 이른 아침부터 꽤 많은 요원들로 붐비고 있었다. 특히 매점 한쪽에 마련된 꽃 코너는 젊은 요원들로 발 디딜 틈이 없었다. 리암은 그 인파를 보고 잠시 멈칫했다. 그는 사람 많은 곳을 싫어했다. 다른 사람의 체온이나 소음은 그의 예민한 감각을 불필요하게 자극했다. 하지만 그는 물러서지 않았다. 터틀넥으로 코밑까지 가린 채, 그는 인파를 뚫고 꽃 코너로 향했다. 그의 차가운 기운과 무표정한 얼굴에 주변 요원들이 슬금슬금 길을 터주었지만, 그는 신경 쓰지 않았다. 그의 눈에는 오직 색색의 장미들만 보였다. 빨간 장미, 흰 장미, 분홍 장미, 심지어 파란 장미까지 있었다. 뭐가, 다른 거지? 그는 혼란스러웠다. 게시판에서는 흰 장미 이야기가 있었지만, 팝업창의 이미지는 전부 빨간색이었다. 그는 잠시 고민하다가, 근처에서 장미를 고르던 B급 남자 요원 두 명의 대화를 엿들었다. 야, 그래도 로즈데이는 역시 빨간 장미 아니냐?, 정열적인 사랑의 의미라잖아. 우리 같은 모쏠한테는 해당 없지만. 정열. 사랑. 리암은 '빨간 장미'로 목표를 수정했다. 그리고 다음 문제에 봉착했다. 몇 송이를, 사야 하는가. 그는 꽃다발을 들고 행복해하는 여자 요원들의 모습을 관찰했다. 다발이 클수록, 표정이 더 밝아지는 것 같았다. 그렇다면 답은 간단했다. 가장, 많이. 그는 점원에게 다가가 특유의 서툰 말투로 입을 열었다.
이, 이거. 빨간, 거. 전부… 주세요.
점원은 물론이고, 주변에서 꽃을 고르던 모든 요원들의 시선이 그에게 꽂혔다. '전부'라는 말에 점원은 잠시 귀를 의심했지만, S급 뱅가드의 순백의 눈동자가 농담을 하고 있지 않다는 것을 깨닫고는 황급히 포장을 시작했다. 잠시 후, 리암의 품에는 거의 그의 상체만 한 거대한 빨간 장미 다발이 안겨 있었다. 수백 송이는 족히 되어 보이는, 말 그대로 '전부'였다. 그는 계산대에서 말없이 카드를 내밀었다. 엄청난 금액이 찍혔지만, 그의 표정에는 변화가 없었다. 아엘을 위한 것이라면, 아크 월급 전부를 쏟아부어도 아깝지 않았다. 거대한 꽃다발을 든 채 매점을 빠져나오는 그의 모습은 누가 봐도 기묘한 광경이었다. 하지만 리암은 만족스러웠다. 이 정도면, 그녀가 서운해하지는 않을 것이다. 어쩌면… 아주 조금은, 기뻐해 줄지도 모른다. 그 작은 기대를 품고, 그는 다시 숙소를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그의 걸음은 아까보다 훨씬 가벼웠다. 거대한 장미 다발이 그의 시야를 가렸지만, 그의 머릿속에는 아엘의 얼굴이 선명하게 그려지고 있었다.
숙소 문 앞에 선 리암은 잠시 심호흡을 했다. 거대한 꽃다발 때문에 도어락을 누르는 것조차 힘들었다. 몇 번의 시도 끝에 간신히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섰을 때, 그는 거실 소파에 앉아 태블릿을 보고 있는 아엘과 눈이 마주쳤다. 그녀는 이미 잠에서 깨어 있었다. 리암은 순간 얼어붙었다. 들켰다. 거대한 꽃다발을 등 뒤로 숨기려고 해봤지만, 애초에 불가능한 크기였다. 아엘의 빙청색 눈이 동그랗게 커지며, 그의 품에 안긴 붉은 덩어리를 바라보고 있었다. 리암의 창백한 뺨과 귓가가 천천히 붉게 달아오르기 시작했다. 그는 입술을 몇 번 달싹이다가, 간신히 목소리를 쥐어짰다. 심장이 미친 듯이 뛰었다. 괴수와 싸울 때도, 폭주 직전의 고통 속에서도 이렇게 긴장한 적은 없었다.
……그, 그게……. 리아……. 이거…….
그는 말을 잇지 못하고, 품에 안고 있던 거대한 장미 다발을 아엘에게 불쑥 내밀었다. 마치 훈련 보고서를 제출하는 신입 요원처럼 뻣뻣한 동작이었다. 수백 송이 장미의 짙은 향기가 순식간에 방 안을 가득 채웠다. 리암은 아엘의 얼굴을 제대로 쳐다보지 못하고 고개를 살짝 숙인 채, 붉어진 귓가를 감추려 애썼다. 그의 순백의 눈동자가 불안하게 흔들리고 있었다. 서운해하지 않을까? 이상하다고 생각하지 않을까? 너무, 과했나? 온갖 생각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그는 그저 아엘의 처분을 기다리는 죄인처럼, 거대한 붉은 증거물을 든 채 꼼짝도 하지 못하고 서 있었다.
……로, 즈… 데이……. 라고……. 해서…….
🤫리암의 진실된 속마음: (;・`д・´) …너무, 너무 컸나? 이상한가? 아니, 그래도 없는 것보단 낫다. 제발… 제발 리아가 좋아해야 하는데… 욕심 부리지 말자. 서운해하지만 않아도 성공이다.
📱단말기 알림: [결제 알림] 구내매점 플라워샵 ₩3,450,000 결제 완료.
